본문 바로가기
미술사_그림이야기

네덜란드 바로크 미술, 솔직한 자화상들을 관찰하며

by 토비언니 2023. 1. 12.
반응형

네덜란드 바로크를 살펴보다...


루벤스(Rubens)가 명성을 날린 플랑드르지역과 대조적으로 국경을 마주한 네덜란드 지역은 신교가 지배적인 독립된 민주국가로 정치, 문화적으로 매우 다른 양상을 나타냈습니다. 여기선 종교화가 금지되었고, 성당, 왕실, 귀족과 같은 미술의 주요한 후원자는 없었습니다. 따라서 역사상 처음으로 미술판매 시장을 통해 작품을 거래하지 않으면 안됐고, 부유해진 네덜란드 중산층은 미술품 수집에 열정적이었고, 1610년과 1670년사이엔 할스(Frans Hals), 렘브란트(Rembrandt van Rijin), 베르메르(Johannes Vermeer)와 같은 3명의 거장들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남녀의 초상화를 즐겨 그렸던 프란스 할스(Frans Hals)의 <즐거운 토퍼>라는 작품입니다.

 

The merry drinker by Frans Hals (ca 1628-1630)/ 출처: Wikimedia Commons

 

그림 속 인물은 지금 거하게 취해있는 모습입니다. 붉은 얼굴에 약간 풀린 눈동자와 왼손에 든 술잔이나 오른손의 개방된 손짓까지 그림을 쳐다보고 있으면 오늘 저녁때 저도 소주 한잔을 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곤 하는데요. 그림 내용이 이처럼 밝다보니, 꼼꼼한 디테일한 묘사에 매달리기 보다는 이탈리아어로 단숨에 그린다는 의미인 그만의 ‘알라프리마 기법’으로 바탕칠을 하지 않고 곧바로 그림을 그려나가 한번의 붓질만으로 즉흥적인 순간을 완벽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전까지는 딱딱한 그룹 초상화가 주류를 이루었으나 할스로 인해 활기차고 각각의 얼굴의 개성이 묻어나는 초상화로 탈파꿈시켰고, 미술사가인 곰브리치는 '그는 어떤 규칙에 따르지 않으면서도 훌륭하게 균형감을 이룩하는 법을 아는 화가'라 칭송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비틂과 균형의 조화를 말하는 것이죠. 대상의 영원 불멸성을 그리기 보다 순간의 표현을 잡아먹는 기법으로 그의 재능을 보여주었습니다.  



다음은 바로크 미술의 최고 거장일 뿐만 아니라, 네덜란드가 낳은 예술적 천재라고 불리는 렘브란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의 작품을 살펴보시겠습니다.

 

The Nightwatch by Rembrandt (1642)/ 출처: Wikimedia Commons

 

 

렘브란트 초기 회화의 대표작 <야경- The Nightwatch> 또는 <바닝코크 대장의 민병대>라고 불리는 이 작품은 그의 예술의 절정을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렘브란트가 죽은 뒤 실제로 세월의 때와 그림을 보호하기 위해 이중 삼중으로 반복적인 니스칠 때문에 어두워져 밤의 장면으로 잘못 알려져서 제목도 야경이 되었다고 하는데요. 원래는 낮을 그린 그림인데 말입니다. 

이것은 16~17세기에 유행하던 집단 초상화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다수의 인원이 등장할 경우 이전 까지는 축구팀 단체사진을 찍듯 일렬로 세워놓고 그려야 하는 판에 박힌 구도를 고수했으나 이를 싫어했던 렘브란트는 새로운 시도를 하게 됩니다. 기존의 진부한 구도에 집착하지 말고 실제 벌어지는 상황이나 사건처럼 재연해보는 것으로 말입니다. 1642년 의류상들과 민병대들의 의뢰를 받아 제작한 작품으로 장사밖에 모르던 중상인들을 마치 실제 전투에 나서는 영웅처럼 잘 바꿔놓았습니다. 국경넘어 네덜란드 군대가 실제로 전투를 벌이고 있었지만 실제로 이들은 야간에 순찰을 도는 민병대일 뿐입니다. 하지만 자신들이 네덜란드를 수호하는 영웅으로 묘사하길 원했고, 렘브란트 역시 실제보다 이들을 더 젊고 군인치곤 화려한 복장으로 묘사하여 그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게 도와주었습니다.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실제 진군하고 총을 쏘고 북을 두드리는 용감한 민병대로 탈바꿈 시킵니다. 더욱이 이 그림의 특이한 점은 측면구도가 아닌 정면구도를 사용함으로써 3차원적으로 앞으로 진군하는 느낌을 주며, 정 중앙에 서있는 대위가 진군명령을 내리고 그의 손 그림자가 옆에 있는 소위의 옷에 그림자로 드리워지며 모두들 전투 준비 태세를 완료한 순간을 포착했습니다. 또한 이 그림에선 어둠과 빛의 명암대비 효과를 나타내던 카라바조가 연상이 되곤 하지만 렘브란트는 단순한 답습이 아닌 한 단계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렸습니다. 여러 무리의 각각이 인물을 부각하려면 강렬한 인공광선만을 가지고는 힘들기 마련인데, 명암의 대비가 심하지 않은 온화한 빛을 사용하면서 화면전체에 통일감을 주고 있습니다. 


네덜란드와 암스테르담의 영광스런 모습을 화폭에 담아내려 했던 작품이었지만,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이 그림에 출연한 사람들 전부가 초상화를 위해 균등히 비용을 부담하였는데 어떤 인물은 어둠에 묻히거나 서로 겹쳐 안 보이는 사람이 있는 경우 불만을 터트렸다고 하는데요. 하지만 이점에 크게 신경쓰지 않은 렘브란트는 화가로써 전체의 구도와 완성도를 위해 인물들이 차지하는 부분의 경중을 인정하고 연극적 요소를 가미하여 오히려 극적으로 살렸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인 것은 이 그림이 그려진 이후 몇몇의 후원자들은 뒤죽박죽 그린 그림이다 또는 렘브란트의 화풍에 대해 실망하였다고 하여 렘브란트는 점점 재정적인 어려움에 빠져들게 되었다고 합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센터 욕심은 많았나 봅니다.

 

 

자화상 (1629, 1660, 1668)/ 출처: Wikimedia Commons

 

렘브란트는 초상화를 많이 그렸기로 알려진 만큼 40년동안 약 80여점의 본인의 자화상을 남긴 자화상의 대가이기도 했습니다. 그의 자화상을 보면 그의 희로애락이 그대로 전해지는 것 같은데요. 초년의 패기와 자신감이 풍기는 자화상에서 모피와 금으로 감싼 중년의 장년기의 초상화, 후기에는 그의 어려움이 화폭에도 전해지는 듯 내면의 세계를 반영하는데 집중하고 있습니다. 

 

렘브란트 회화는 대담하고 두꺼운 물감 사용법이 그 특징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의 기법은 물감으로 부조를 뜨는 것 같아서 붓으로 물감을 두껍게 칠한 후 밝은 부분은 팔레트 나이프를 사용하여 손가락 굵기의 두꺼운 물감을 Impasto- 임파스토(물감을 두껍게 칠하여 중요 부위를 강조하여 질감효과를 내는 유화 기법)기법으로 발라나가는 것인데요. 그 대담한 화필로 조용하고 엄숙한 분위기의 작품들이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세 아이를 먼저 잃고 첫번째 아내뿐 아니라 말년의 정부도 그보다 먼저 죽었는가 하면 그 많던 재산도 고소와 파산을 거듭하며 마지막엔 화구와 몇 벌의 옷만 그에 남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서 한 치의 어긋남이 없이 그의 모습 뿐만 아니라 그에게 작품을 의뢰했던 사람들의 모습까지 화폭에 옮겼던 렘브란트의 자화상이 그래서 사람들에게 아직까지 사랑받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반응형

댓글